0503 김헌정열사 14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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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헌정 열사 14주기 추모제 추모사
최나리 민주일반연맹 민주연합노조 정선지부 부지부장.
김헌정.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추도사를 제안받고 당황했습니다. 추도사를 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76분짜리 영상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분도 채 보기 전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떠나는 이를 기억하는 남은 이들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단 2분 안에 누군가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대를 같이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쉽고, 또 그리웠습니다. 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닌데도,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아닌데도 떠난 이를 그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뚝뚝한 많은 우리 아버지들이 그에 대해 ‘눈물이 나서 말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든 것은 무슨 힘일까요?
그것은 공감입니다. 우리가 겪어본 것을 좀 더 자세히, 세심하게 알아봐 주고 한없이 따뜻하게 챙겨주었습니다. 아무도 되어주지 않던 나약한 내 편이 되어주던 그분을, 그래서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저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을 애정하는 초보자입니다. 셋째 막둥이를 낳고 복귀해서 집행부에 입성한 지 이제 8개월째입니다. 정선지부의 4년이란 짧은 역사 가운데 반 이상을 집에서 보내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저는 확실하게 초보인데, 심화반에 와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어쩌다 운 좋게 시험 한번 잘 보고 월반해서 형님 반에 와있는 적응 못 하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운 좋게도 먼 곳에서도 가르침을 주시는 열사를 알 게 돼 또 한 번 배웁니다. 저에게 방향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깊게 내린 그분의 뿌리는 지금의 저에게까지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제가 편하게 학교 다니던 20~30년 전에 수많은 노동 착취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우리 선배 동지들은 김헌정 열사를 만나 권리와 인격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도 넘게 지난 2019년, 저는 미천한 개인이자 보호막 하나 없는 약자로, 내 월급이 최저시급이 안 되는지도 모른 채 누가 내 적은 월급을 알까 봐 겁내는 경력 10년 차 영양사로 보건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입사 10년 차. 2019년 저의 기본급은 150만 원이었습니다. 최저시급 미달이었습니다. 알아보니 2018년에도 최저시급 미달이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속는 부분은 ‘에이… 공공기관에서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이런 부분입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에서 그런 일이 잘 일어나더라고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회사에 요구했지만 6개월 내내 아무도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6개월 동안 좋게 말로만 해봤자 허공에 외마디였습니다. 왜 10년 동안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노동법에 묻는 것이 겁이 났을까요? 왜 10년 동안 나를 알아주지 않던 사람들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했을까요.
노동자로 살면서 바보 같이 노동조합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이제라도 법에 어긋난 걸 알았으니 고민하다 노동부에 신고했습니다. 사측에 입도 뻥끗하지 말라던 바보 같은 우리 팀장은 출석요구 전화를 받자마자 소급분을 부랴부랴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월급도 올랐습니다. 당연히 최저시급으로요. 알바생과 경력 10년 차가 똑같이 최저시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제3자의 전화 한 통에 우리는 월급이 올랐다는 겁니다. 작은 희망이 보이면서도 허탈한 경험이었습니다. ‘너희들도 정말 미개한 인간이구나’ ‘나도 몰랐지만 너도 몰랐구나’
더 이상 모르는 것은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공부 해야 합니다. 옆사람만 믿고 나는 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자기투쟁은 당사자가 투쟁해야 한다!’ 이 말을 올곧이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지치지 않겠습니다. 노동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만 노동조합을 지킬 수 있고, 그 힘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그 투쟁의 힘이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조합원 중심주의! 열사에 대해 알아가며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던 수많은 생각을 하나로 집약시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혼자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며 느꼈던 두꺼운 벽이 노동조합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허물어졌습니다. 혼자 하는 싸움은 모든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같이 하니까 됐어요. 일이 정말 쉽게 풀리는 것이 꿈 같았습니다. 통장에 찍히는 돈이 달라졌습니다. 월급 앞자리가 항상 1이었는데, 이제는 2, 3, 4, 5 막 찍힙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일이 잘 풀리는 순간이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에 가입한 뒤였습니다. 같은 정선군에서 일하는 공무직이 200명씩이나 되는지도 모른 채 10년을 살았는데, 노동조합을 만나며 함께 소중한 인연도 만들었습니다.
맨몸으로 부딪쳐 주셨던 선배 동지님들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빠르게 이루어 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는 안전한 환경에서 투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쓰레기를 투척하는 통쾌함에 나도 모르게 기쁨의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우리의 든든했던 뒷배 김헌정 열사가 뒤에서 지켜주고 있지 않았다면, 고단한 세상에서 우리는 한 번이라도 통쾌하게 웃음 지을 수 있었을까요?
‘노동자가 주체로 서지 않는 노동조합은 모래성과도 같다’ ‘노동자들 앞에서 재롱 피우듯이 투쟁을 끌고 갔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끔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매뉴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똑같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말이죠. 초기 열정적인 집행부 몇몇 사람이 우리 앞에서 재롱 피우듯이 끌고 갔던 투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고, 또 너무 빨리 얻은 성과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거나, 과거를 너무 빨리 잊었던 우리 지부의 동지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우리 조합원도 반토막이 났고, 그래서 우리 정선지부도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남아있는 조합원들이 말합니다. “저는 노조 이런 거 처음이고,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 낯설다” “급여도 알아서 주겠지, 주는 대로 받을게요” 아직도 이런 맥 빠지는 소리하는 조합원님들이 많습니다.
바로 김헌정 열사께서 쉬지않고 말했던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나쁜 조합원은 없다’ 이 말씀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이며 끌어안겠습니다. 모래성은 허물어 버리고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리겠습니다.
열사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는 내내 더욱더 강력해지는 민주연합노동조합의 힘에 반갑고, 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지금 제가 아는 지부장님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나오는 영상에 반가움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김헌정 열사의 죽음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두렵고, 아팠습니다. 똑똑한 사람, 가난하지도 않았던 사람, 본인만 잘 살고자 했다면 가족들과 충분히 편하게 살았을 사람.
하지만 노동자들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간 사람,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면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기 챙피한 우리 가장들의 민낯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사람, 김 씨, 최 씨, 이 씨로 불리던 우리네 아버지들이 사람대접을 받도록, 사측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 그냥 우리를 위해 존재했던 사람.
커다란 입, 찢어진 눈, 순박한 웃음, 커다란 포부와 당당함에 비해 왜소했던 몸. 그런데 빛이 나는 사람.
그립습니다. “김헌정 말은 법이다! 김헌정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저도 그런 말 해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어떻게 하라고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들만 아끼고, 돌봐주고, 정작 본인의 몸은 돌보지 못한 것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닌데, 그저 우리 곁에 더 오래 남아주시는 게 더 좋은데. 이렇게 힘든 시기에 어디라도 계신다면 찾아가서 말 한마디 듣고 싶은데.
너무 똑똑했던 열사님은 우리의 그런 마음은 모르고 가셨나 봅니다.
외로운 우리 선배 동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도 깊이 뿌리내린 열사의 정신은 저에게 울림입니다. 몰라봬서 죄송했습니다. 저 이제 김헌정 열사님 잘 압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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