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민주노총 공동기획
윤석열 정부가 ‘미조직 노동자’를 주목한다. 생경한 일이다. ‘조직’의 반대말인 미조직은 노동운동의 언어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 더 정확히는 사용자와 정부의 개입과 방해로 노조를 조직할 수 없는 노동자를 포괄하는 단어였다. 윤석열 정부는 이들을 다시 ‘노동약자’라 부르며 조직노동자를 강자로 규정해 사이를 가르려 한다. 지향은 명료하다. 이들을 미조직으로 남기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조의 지향은 뭘까. <매일노동뉴스>가 민주노총의 전국 미조직 노동자 노동환경실태 정기 설문조사를 맞아 함께 미조직 노동운동 속으로 들어가 봤다. <편집자>
정책은 법률과 예산이라는 양 날개로 난다. 법률이 없는 예산은 불용하고, 예산이 없는 법률은 무용하다. 그래서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려면 법률을 정비하고 예산을 편성한다. 이런 과정을 이해한다면 미조직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약자를 지원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호언을 쉬이 수긍하긴 어렵다. 정부가 편성한 내년 노동약자 지원사업 예산은 160억원에 불과하고, 노동약자 지원과 보호를 위한 법률(노동약자 지원법)도 발의 전이기 때문이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연내 발의를 다짐하고 있지만 순탄해 보이진 않는다.
누구나 알지만 법률로 정의하기 어려운 노동약자
2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노동약자 지원법의 최대 난제는 노동약자의 정의다. 윤 대통령은 4월4일 민생토론회 점검회의와 5월14일 스물다섯 번째 민생토론회에서 연이어 노동약자를 호명했다. 범위가 넓다.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은 “우리 사회는 성장 과실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는 많은 노동약자들이 있다”며 “거대노조 보호를 받는 노동자도 많지만 소외돼 있는 미조직 근로자와 비정규직 근로자를 비롯해 근로형태 변화와 함께 등장한 특고 종사자, 사무실 없이 일하는 배달·대리운전·택배기사 같은 플랫폼 종사자가 그런 분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틀림없이 ‘노동약자’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약자’는 법률 용어가 아니다. 국회가 법률을 만들려면 이들을 ‘정의’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근로기준법 적용을 확대해 사각지대를 좁히거나, 일하는 사람 기본법 같은 별도 입법을 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면 기존의 법·제도의 보호를 무리 없이 받을 수 있다. 혹은 노조밖 노동자에 특히 주목한다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손봐 조직률을 높이던지, 아니면 단체협약 효력을 확장하는 방안도 구상할 수 있다. 이중 일하는 사람 기본법은 윤 대통령의 대통령후보 시절 공약이기도 하다. 다만 정부 차원의 일하는 사람 기본법 입법 논의는 ‘백지’ 상태다. <매일노동뉴스 8월9일자 “[노동약자지원법 이어] 정부 ‘일하는 사람 기본법’도 추진하나” 기사 참조>
근기법 확대·노동약자법 제정 ‘투 트랙’
전문가들은 ‘투 트랙’을 전망한다. 근로기준법 확대와 노동약자 지원법 입법이다. 박지순 고려대 교수(법학)는 “현행 노동법체계의 사각지대에 있는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 등은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현행 법률을 확대 적용하는 게 가능하고 김문수 장관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며 “이와 달리 약자는 분명하나 현행법상 노동자로 포섭되지 않는 그룹이 이른바 ‘노동약자’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할 텐데, 이를 포괄하는 법률이나 제도를 (노동약자 지원법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고 (노동약자 정책 취지를 고려하면 이 방향에) 우선순위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또다시 질문이 생긴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배달·대리운전·택배기사 같은 이들은 자영업자의 외피를 걸치고 있다. 기존에 이들 보호가 어려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자영업자 가운데 이른바 ‘노동약자’만 어떻게 다른 자영업자와 분리해 법률 지원 대상으로 삼을지가 관건이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21대 국회 당시 일하는 사람 기본법 논의에서도 같은 쟁점이 있었다”며 “마찬가지로 노동약자 지원법의 대상을 어디까지 할지 똑같은 고민이 있다”고 밝혔다.
누가 노동약자인지 알 수 없다 보니 정부가 노동약자 지원법 얼개로 내놓은 대책도 효과를 따지기 어렵다. 정부는 노동약자 지원법의 요소로 △공제회 설립 지원 △분쟁조정협의기구 설치 △휴게시설 마련을 꼽았다.
‘취약노동자’ 유형화하면 보호방안 더 잘 보여
이런 정부 대안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공제회는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삼는 일종의 사적 보험이다. 산업재해나 노후보장, 실업 시 보호망을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 소장은 “공제회는 국가서비스가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을 특수한 직역에 한해 상호부조로 만회하는 형태로, 사회안전망을 대체하는 게 아니다”며 “기존에 추진했던 전 국민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제도를 확대하면 이른바 노동약자가 퇴직후 구직급여를 받고 육아휴직급여도 수령하고 노후도 대비할 수 있는 등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표준계약서는 계약당사자 간 공정한 거래를 원칙으로 하지만 강제가 아니라 권고라 위반 시 과태료나 벌점 같은 벌칙조항이 없다. 유명무실하다는 의미다. 결국 노동약자를 지원하기에 효과가 지엽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 이사장은 “(노동약자 지원법을 제정하기 보다는) 현행 법률의 시행령이나 사업 정도로 추진할 내용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정공법은 노동약자를 제대로 정의하는 것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연구가 없지도 않다. 학계는 10여년 전부터 취약노동자를 유형화해 분석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취약노동자를 취약고용(vulnerable employment)의 형태로 정의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개념을 수용해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을 개념화했다. 살펴보면 우선 일을 하지만 소득이 낮은 저임금 노동자다. 통계적으로 최저임금 이하이거나 차상위 계층이 속한다. 또한 △고용형태 취약 노동자 △사회안전망 배제 노동자 △인적 속성별 취약노동자가 해당한다. 인적 속성별 취약노동자란 여성·고령·장애인·이주민·저학력 노동자 등을 말한다.
노동약자 보호, 취약성 제거가 정답
노동약자를 보호하겠다면 이들의 경계를 뭉뚱그릴 게 아니라 명확히 살펴 취약성을 제거하면 된다. 김 이사장은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최저임금으로 할지, 공적이전소득 정책을 펼칠지 등 논의로 전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뜻밖에도 노동약자의 ‘정체’를 분명히 하면 현행 법제도 적용 범위 확대와 차별 시정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사회안전망 배제 유형에 대해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 확대 정책을 지속하는 게 정답일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사회보험 확대 방법을 열거식으로 할지 포괄식으로 할지 등 기술적 논의로 발전할 수 있다. 노동계는 이미 확대를 전제로 이들의 보험료 부담을 완화할 직장가입자 전환 요구까지 나아간 상태다. 인적 속성별 취약노동자의 경우 이미 현존하는 다양한 법령 속 차별금지 조항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행정력으로 취약성을 해소할 수 있다.
이처럼 노동약자를 정확히 정의하려면 결국 ‘누가 취약노동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사회는 법원이 답안지를 내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정부의 역할로 귀결하는 모습이다. 유럽연합은 최근 자영업자로 오분류된 플랫폼 노동자를 가려내기 위해 노무제공의 실질을 근거로 고용관계를 추정하는 입법지침을 결정했다. 지침에 따르면 플랫폼 노동자는 우선 노동자성을 인정 받고, 이에 대한 반증은 기업이 해야 한다. 입법지침은 회원국 정부에 2년 내 지침에 따른 입법을 하도록 강제한다. 유럽연합 회원국은 제도를 정비해 노동자성을 다툴 경로도 마련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거꾸로 가는 노동약자 행정
고용보호 조항 잇따라 삭제 … 내년 예산 160억원 불과
“노동약자를 보호한다”는 대통령의 말과 달리 행정은 반대로 가고 있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노동행정 정책을 보면 오히려 노동약자를 지우는 데 적극적이다.
고용형태 공시제 축소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300명 이상 기업이 직접고용과 간접고용 노동자 사용 규모를 매년 공시하도록 한 제도다. 비정규직 규모를 가늠하고, 기업에 직접고용 확대를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제도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2월 고용정책기본법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1천명 이상 기업의 사업장별 고용형태를 공시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했다. 노동부는 “고용형태 현황을 세분화해 공시해야 해 기업 부담은 크고 고용구조 개선 효과는 낮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상파 방송사 공통 재허가 조건인 방송사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성별 채용 차별 방지 방안 조건을 삭제했다.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성별 차별 방지 방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정부의 입김이 닿는 영역에서조차 노동약자 규모를 파악하거나 처우개선을 압박하지 않겠다는 행보다.
결정적인 것은 내년 노동약자 지원 예산이다. 고작 160억원 편성했다. <매일노동뉴스 8월28일자 “노동약자 지원 사업에 160억원 투입” 기사 참조> 66억원을 상생형 근로복지기금 지원 사업에 쓰기로 했는데 이 사업은 원청과 정부가 함께 복지기금을 만들어 협력사에 ‘베푸는’ 제도다. 새로운 사업도 아니고 이미 올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사업을 재탕했다.
일부는 적용 범위만 바꿨다. 근로자이음센터는 사업대상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서 노무제공자로 넓혔고, 일터개선 지원사업은 노무제공자에서 영세 자영업장으로 확대했다. 분쟁조정협의회를 만들 계획이지만 직접 분쟁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지침이나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법률도, 돈도 없이 노동약자만 외치는 정부에 노동자들은 진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전호일 민주노총 대변인은 “노동계가 추진한 노란봉투법이나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등에 반대하면서 정부가 꺼낸 카드는 노동약자 프레임을 선점하려는 목적의 노동약자 지원법”이라며 “실질적으로 노동약자를 대변하겠다면 그간 노동계가 요구해 온 정책들을 거부권으로 막아서지 말고 실행하면 될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