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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단독] ‘한 켤레 2200원’ 제화공은 소사장 아닌 노동자…퇴직금 소송 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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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 켤레 2200원’ 제화공은 소사장 아닌 노동자…퇴직금 소송 승소

장현은 기자2024. 4. 2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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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사건
2000년 이전엔 제화공은 모두 ‘노동자’였지만 대형 패션업체가 노무 비용을 줄이려고 ‘소사장제’를 잇달아 도입하면서 현재는 월급이나 퇴직금을 받는 이가 거의 없다. 신발창과 굽을 만드는 저부 공정을 하는 한 제화공의 모습.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2200원.’

13년간 구두를 만들어 온 제화 노동자 ㄱ씨가 퇴직 직전에 받았던 구두 한 켤레당 보수다. ㄱ씨가 구두 장인이 되어가는 13년 동안 노동의 대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ㄱ씨는 회사를 나오며 퇴직금을 요구했지만, 13년간 그에게 일을 시킨 회사는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재판장 김도균)는 지난 4일 ㄱ씨 등 제화공 15명이 제기한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계약서가 없고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제화 노동자들에 대해, 법원이 다시 한 번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ㄱ씨 등은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ㄴ제화업체에서 짧게는 1년6개월, 길게는 15년 일한 제화공들이다. ㄴ업체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다른 회사의 의뢰에 따라 상품을 제작·생산했다. 이들은 팀을 나눠 구두 틀을 제작하는 ‘갑피’ 작업과 이 틀을 조합하는 ‘저부’ 작업을 담당했다. ㄱ씨는 저부팀 소속으로, ㄴ업체에서 지난 2006년부터 2019년까지 13년 일했다.

이들의 업무는 보통 오전 6시께 시작됐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출근 시간은 있었지만, 퇴근 시간은 없었다. 일감 바구니에 놓인 ‘계량지’에 따라 업무량이 정해졌다. 계량지에는 어떤 모델의 구두를 몇 개 제작해야 하는지가 적혀 있고, 그일을 마쳐야 퇴근할 수 있는 구조였다. ㄱ씨도 물량을 맞추기 위해 보통은 밤늦게 또는 새벽까지 일했다. 퇴사하기 1년3개월 전까지는 토요일도 매일 출근했고, 지시가 있으면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했다. 급여는 구두 한 켤레 기준 2200원으로 계산해 받았다. 계량지에 적힌 작업량에 따라 매달 100만원∼400만원의 월급이 들어왔다.

하지만 회사는 이들을 ‘노동자’로 보지 않았다. 회사는 팀장들과는 업무용역계약서를 작성하고, 나머지 팀원들과는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4대 보험에도 가입시키지 않았다. 급여를 주는 방식도 들쑥날쑥했다. 한동안은 개별적으로 급여를 주다가, 2010년도 중반 제화공의 노동자성이 문제가 되자 갑자기 팀별 급여를 주고 팀장이 이를 배분하게 했다. 회사 편의에 따라 사업자등록을 시키기도 했다. 그 모든 변화에도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제화공들이 퇴사하면서 퇴직금을 요구했지만 회사 쪽은 근로자가 아니기에 퇴직금을 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ㄱ씨를 비롯한 제화공들은 재직기간에 상응하는 퇴직금 및 그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ㄴ업체는 법정에서 “팀장들과 업무용역위탁계약 체결해 갑피작업과 저부작업 위탁 했을뿐 (회사가 근로를) 지휘·감독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업무지시를 하거나 장소, 시간을 지정한 사실이 없다고도 반박했다. 모두 팀장의 재량이었다는 식의 주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ㄱ씨 등이 분명한 업무 지시와 통제하에 ㄴ업체에 종속돼 근로를 제공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ㄱ씨 등이 수행한 작업은 ㄴ업체의 정규직 직원이 작성한 계량지와 완성품 견본에 따라 이뤄졌고,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며 “자신들이 작업한 구두가 얼마나 판매됐는지, 그로 인한 수익이 얼마인지 등과 무관하게 작업량에 비례해 보수를 지급받은 등 독립하며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짚었다. 원고가 팀장과 작성한 업무위탁계약서와 관련해서는 “뒤늦게 위탁계약의 외형을 만들기 위해 형식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거나 그 기재 내용을 신뢰하기가 어렵다”며 “팀장들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과 ㄴ업체 사이에 아무런 계약서가 작성되지 않았다 해도, 근로자성을 인정함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이번 소송은 제화공 노동자성 인정의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 제화공이 일명 ‘소사장님’(개인사업자)이라는 이유로 4대 보험과 퇴직금, 연차 휴가를 보장받지 못했다. 개인 사업자로 위장 고용해 업체 사장은 세금과 사회보험 부담금을 회피하는 반면 제화공은 노동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 법원은 잇따라 제화공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017년 1월 구두 제조 회사 ‘탠디’가 지정한 장소에서 근무한 갑피공과 저부공을 근로자로 인정하고 퇴직금 청구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 2020년 서울중앙지법도 탠디의 하청 회사를 상대로 제화공이 제기한 퇴직금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정을 내렸다. 지난 2018년에는 ‘소다’ 공장에서 일해온 제화공이 제기한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이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ㄱ씨 등을 소송대리한 손익찬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근로자성이 인정된 판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계 관행은 여전하다”며 “제화업체가 몰려있는 서울의 사례이고, 대형 구두 제조 업체이므로 상황이 다르다며 퇴직금 지급을 거절하는 소규모 업체들이 있는데 그런 한계를 넘어선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지부장은 “이미 판례가 확립되었는데도, 도대체 언제까지 노동자성을 계속 증빙하고 법리적으로 다퉈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겨우 공임을 인상해놓아도, 일부 공임을 급여로 지급하지 않고 퇴직금으로 쌓는다는 꼼수를 부리는 회사들도 있다. 상생하면서 제화공 처우 개선을 해나갈 방향을 지속해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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